I. 서론
레바논은 다시 한번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2026년 2월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상대로 선제 공격을 가해 미국-이란 전쟁이 발발하였고 이란 최고 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가 암살된 후, 마침내 헤즈볼라는 이스라엘을 향해 로켓 공격을 감행하며 이 전쟁의 새로운 전선을 열었다. 미국-이란 전쟁 발발 이후 레바논의 정치·경제 위기는 더욱 심화되었으며, 불안정한 정치·경제·안보 환경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그런데 레바논과 이스라엘 정부가 수개월간의 직접 협상 끝에 2026년 6월 26일 금요일 미국 의 중재로 기본 협정을 체결하자,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에서는 시위대가 거리로 나와 휴전 협정에 반대하며 이 협정에 대한 분노를 표출했다.
오랜 전쟁에 지친 베이루트 시민들에게 휴전 협정은 평화와 안식을 줌에도 불구하고 시위대 중 많은 이들은 이 휴전 협정에 반대하는 헤즈볼라의 깃발을 흔들며 레바논과 이스라엘 간 휴전 협정에 반대를 표시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하나의 의문을 제기한다. 즉, 왜 이스라엘과의 오랜 전쟁에 지친 많은 베이루트 시민들은 헤즈볼라에 동조하며 이 휴전 협정에 반대할까?
헤즈볼라는 레바논에 기반을 둔 시아파 무슬림 정당이자 무장 단체로, 이란의 지원을 받으며 이스라엘의 레바논 남부 지역 침공 및 점령에 군사적으로 맞서고 있다.
이스라엘과 헤즈볼라는 2023년 10월부터 다양한 강도로 교전을 벌여 왔지만, 이스라엘은 두 차례에 걸쳐 헤즈볼라와의 전투를 확대했다. 첫 번째는 2024년 9월이었고, 두 번째는 약 4개월 전인 2026년 2월 미국-이란 전쟁이 발발한 직후였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본 논문은 다음과 같은 두가지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고자 한다: 첫째, 이란의 지원을 받는 헤즈볼라가 어떻게 레바논에서 탄생했는지?; 둘째, 헤즈볼라는 레바논의 합법적 정부와 정규군의 제지 없이 어떻게 이스라엘과 같은 외국에 대한 군사 공격을 자유롭게 감행할 수 있을 정도로 레바논 내에서 강력한 정치적, 군사적 힘을 가지게 되었는지?
II. 헤즈볼라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1. 개요
헤즈볼라는 레바논에서 자생적으로 탄생한 시아파 무슬림 정당이자 무장 단체로, 광범위한 군사 기구, 정치 조직, 사회 복지 서비스 네트워크를 통해 “국가 안의 국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75-1990년 동안 15년간의 레바논 내전의 혼란 속에서 결성된 헤즈볼라는 이란의 오랜 지원을 받아 왔는데 이스라엘에 대한 반대와 중동에서 서방의 영향력에 대한 저항을 주요 목표로 삼고 있다.
헤즈볼라는 전 세계적으로 테러 공격을 감행해 온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그 결과 헤즈볼라의 일부 조직,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전체 조직이 미국을 비롯한 여러 서방 국가에 의해 테러 단체로 지정되었다.
헤즈볼라는 레바논 사회의 시아파 공동체에서 기원했다. CIA 월드 팩트북의 2022년 추산에 따르면, 시아파는 레바논 인구의 31.2%를 차지하는 데, 그림 1이 보여주듯, 남부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와 그 주변 지역인 Dahieh, 그리고 동북부 베카 계곡 지역에 주로 거주하고 있다.

그림 1: 레바논 지도 (출처: 브리태니카 백과사전)
레바논은 1943년 11월 22일 프랑스군이 레바논에서 철수하면서 독립을 쟁취했다. 1943년 채택된 국민협약은 레바논 통치의 틀이 되었으며, 이를 통해 17개의 종파 공동체 각각에 인구 비율에 따라 의회 의원직과 고위 관료 및 정치직 임명과 같은 정치적 특권이 배분되었다. 대통령직과 총리직이라는 가장 중요한 두 직책은 각각 기독교 마론파와 수니파 무슬림에게 주어졌으며, 시아파는 레바논에서 세 번째로 큰 인구 집단이라는 점을 인정받아 레바논 의회 의장직을 맡았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배분에도 불구하고 시아파는 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레바논 내에서 소외되어왔다.
먼저 1943년 국민협약에 따라 입법부, 행정부, 군사직책이 레바논 내 18개 종파의 인구 규모에 비례하여 배분되었기 때문에 인구가 적었던 시아파는 정치적으로 과소 대표되었다. 1946년 당시 기독교 마론파와 수니파 무슬림은 레바논 최고 공직의 각각 40%와 27%를 차지했지만, 시아파는 3.2%만을 차지했다. 1980년대에 이르러 시아파는 약 140만 명에 달하는 인구를 보유하며 레바논에서 단일 종교 공동체 중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게 되었고, 마론파와 수니파 인구(각각 약 80만 명으로 추산)를 넘어섰다. 따라서 시아파는 자신들의 인구 규모에 비해 정치적 대표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레바논의 시아파 공동체는 경제적으로 매우 가난했다. 시아파 인구의 거의 85%는 남부 레바논의 농촌 지역과 동북부 베카 계곡에 거주하며 주로 국영 담배 판매점에서 담배를 팔거나 채소를 재배하여 생계를 유지했다. 또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간의 군사적 충돌에도 자주 노출되었다. 이러한 암울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많은 시아파 사람들이 수도 베이루트 동부의 빈민가와 베이루트 남부 교외의 판자촌으로 이주했다.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교의 정치학과 부교수인 Ahmad Niza Hamzeh는 자신의 저서 “헤즈볼라의 길에서”에서 “이 두 지역은 ‘고통의 벨트’로 알려져 있으며, 1980년대 시아파 무장 세력의 온상이 되었다”고 썼다.
2. 헤즈볼라 이전의 시아파 정치 운동
1943년부터 1990년까지 레바논 남부와 베카 계곡의 시아파 거주 지역은 레바논 정부가 다른 지역에 국가 자원을 집중하면서 오랫동안 소외되었고, 시아파는 정부 내에서도 발언권이 거의 없는 극심한 과소 대표 상태에 놓여 있었다. 독립 후 초기 레바논 사회는 전통적으로 유력 봉건 가문 출신의 정치 보스인 자임(za’im)에 의해 지배되었다. 자임 제도는 초창기부터 강력한 비판을 받았는데, 특히 이라크의 시아파 성지인 나자프에서 교육받은 시아파 성직자 무함마드 자와드 무그니야는 1956년 신문 사설을 통해 자본주의, 봉건주의, 친서방 바그다드 조약을 비판하고 “사악한 정치인과 지배 세력”으로부터 농민을 보호할 것을 주장하며 농민을 위한 정의를 요구했다. 무그니야의 저항 운동은 이후 무사 사드르에게 계승되었다.
레바논 내 봉건주의에 대한 반대가 더욱 거세짐에 따라 1960년대 후반에는 자임(za’im)의 권력이 거의 남지 않게 되었다. 그 결과 점점 인구가 늘어나던 시아파는 다양한 좌파 조직에 몸을 담게 되었는데, 특히 레바논 체제의 개혁과 종파주의의 폐지를 요구하는 조직에 관심을 집중했다. 1960년대 초부터 1970년대까지 시아파는 아랍 민족주의 운동, 바트당(1947~1966), 레바논 공산당, 시리아 사회 민족주의당, 진보 사회당(1958년에는 당원 중 시아파가 20%를 차지함), 그리고 레바논에 기반을 둔 팔레스타인 중심 파벌인 파타,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다.
아랍 민족주의 운동 출신의 시아파 인사들은 사회주의 레바논, 레바논 사회주의자 조직, 레바논 공산행동기구, 그리고 계급 갈등을 종식시키는 최고의 수단으로 폭력을 옹호한 아랍 사회주의 행동당 등 여러 정당을 창설하기도 했다. 많은 시아파 인사들이 좌파 진영에서 두각을 나타냈는데, 특히 마르크스-레닌주의 지식인인 후세인 므루에와 마흐디 아멜, CAOL 지도자 모흐센 이브라힘, 그리고 아랍 사회주의 바트당 지도자 아셈 칸소가 대표적이다.
3. 1960년, 70년대 무사 사드르
1960년대와 70년대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 이맘 무사 알 사드르는 정치적으로 소외되었던 레바논의 시아파들을 활성화시키기 시작했다.
1960년, 이란 출신인 이맘 무사 사드르는 레바논에 와서 티르(Tyre)에서 시아파 지도자로 활동했다. 그는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소외되었던 레바논 시아파를 위한 가장 저명한 옹호자 중 한 명이 되었다. 1969년 그는 시아파 공동체의 레바논 정부 참여를 확대하기 위한 기구인 최고 이슬람 시아파 평의회의 초대 의장으로 임명되었다. 1974년에는 시아파의 경제적, 사회적 환경 개선을 위한 “소외된 자들의 운동”을 창설했다. 그는 레바논 남부 전역에 여러 학교와 의료 시설을 설립했으며, 그중 상당수는 오늘날까지도 운영되고 있다. 1975-1990년 레바논 내전 당시 그는 처음에는 레바논 민족 운동에 합류했고, “소외된 자들의 운동”은 아프와즈 알-무카우마 알-루브나니야(레바논 저항 연대), 일명 ‘아말 운동’으로 알려진 무장 조직을 결성했다.
‘아말 운동’은 카리스마 넘치는 무사 사드르가 설립한 “소외된 자들의 운동(하라카트 알 마흐루민)”에서 시작되었지만, 1978년 사드르가 납치된 후 1979년에는 세속적 지도자인 후세인 후세이니, 그리고 1980년부터는 나비 베리가 이끌었다. 베리의 지도력 아래에서 아말 운동은 시리아의 지원을 받는 엘리아스 사르키스를 대통령으로 지지하고 무사 사드르가 추진했던 사회·정치 개혁 투쟁을 방해함으로써 많은 시아파 신도들의 반감을 샀다. 아말 운동의 세속화는 시아파 활동가들의 투쟁을 확산시키기에 이상적인 환경을 제공했다.
무사 사드르는 레바논 국가를 합법적이지만 개혁이 필요한 실체로 여겼고 개혁 성향의 기독교 정치인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지만, 이라크의 시아파 성지인 나자프의 일부 레바논 시아파 신학생들은 레바논 국가, 현재의 국경, 그리고 연합적 권력 분담 방식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이들은 이라크 나자프 시아파 신학교(하우자)의 주요 성직자 중 한 명인 이라크 아야톨라 무함마드 바키르 알 사드르(무사 사드르의 사촌)의 감독 하에 조직되었다. 이들은 비밀 네트워크로 구성하며 이슬람 국가 건설을 주장했는데, 이 네트워크는 ‘히즈브 알 다와’(소명의 당)로 잘 알려지게 되었고, 레바논에도 자매 정당을 설립했다.
4. 헤즈볼라의 출현 및 부상
헤즈볼라 조직은 일련의 급진적 사건들을 겪으며 발전해 왔다. 1943년 레바논 독립 이후, 레바논의 시아파 공동체는 레바논 내에서 가장 가난한 공동체였으며, 수니파-기독교 마론파 연합 정권에 의해 정치적으로도 소외되어 공동체 규모에 비해 심각하게 과소 대표되었다.
1976년, 카란티나 학살과 시아파 거주지인 나바아 및 시아파 주민이 43%를 차지하는 팔레스타인 난민촌인 텔 알 자아타르 포위 사건이 발생해 10만 명이 넘는 시아파 주민들은 동베이루트 칸톤에서 Dahieh와 남부 레바논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78년 “소외된 자들의 운동”을 창설한 시아파 성직자 무사 사드르가 실종되고, 거기에다 1979년 시아파 이란 혁명이 성공되자 레바논 시아파 공동체 내에서는 급진화 분위기가 크게 고조되었다. 특히 이란 혁명 성공의 영향은 매우 컸는데, 1980년 9월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했을 때 약 500~600명의 아말 운동의 자원봉사자들이 이란으로 건너가 이란 국방장관인 무스타파 참란에 힘을 보탰다.
헤즈볼라의 출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결정적인 사건은 19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이다. 침공 이전,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는 남부 레바논을 근거지로 삼아 이스라엘에 대항해 싸웠다. 이스라엘은 PLO를 축출하고 레바논 내 자신들의 동맹인 바시르 게마옐을 대통령으로 앉히기 위해 레바논을 침공했고,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 군은 남부 레바논 마을의 80%를 파괴하였고 그 결과 약 40만 명이 난민이 발생했다.
이러한 레바논 내 혼란의 와중에 헤즈볼라는 1982년 레바논 시아파 성직자들이 이란 혁명수비대(IRGC)의 지원을 받아 창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헤즈볼라 민병대는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에 대응하기 위해 일찍 설립되었지만, 공식적으로는 1985년 첫 선언문 발표를 통해 창설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레바논을 침공하고 이어 점령군이 된 이스라엘을 레바논에서 몰아내기 위해 무장 조직인 헤즈볼라가 결성되었던 것이다.
Ahmad Nizar Hamzeh 교수는 자신의 저서 “헤즈볼라의 길에서”에서 다음의 네 가지 위기 상황이 헤즈볼라의 출현을 촉진했다고 주장했다.
a. 시아파의 정체성 위기와 소외
1943년 11월 22일 레바논이 독립했을 때, “시아파는 자신들이 기독교 마론파-수니파 무슬림 연합 세력이 통치하는 국가에서 멸시받는 자식처럼 느꼈다.” 따라서 레바논 내 시아파 공동체는 헤즈볼라와 같은 시아파 보호 조직이 등장하기에 적합한 환경이었다.
b. 레바논 내 구조적 불균형
1943년 국민협약에 따라 입법부, 행정부, 군사직책이 레바논 내 18개 종파의 인구 규모에 비례하여 배분되었기 때문에 인구가 적었던 시아파는 정치적으로 과소 대표되었다. 1946년 당시 기독교 마론파와 수니파 무슬림은 레바논 최고 공직의 각각 40%와 27%를 차지했지만, 시아파는 3.2%만을 차지했다. 1980년대에 이르러 시아파는 약 140만 명에 달하는 인구를 보유하며 레바논에서 단일 종교 공동체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게 되었고, 마론파와 수니파 인구(각각 약 80만 명으로 추산)를 넘어섰다. 이에 따라 시아파 공동체는 자신들의 인구 규모에 비해 정치적으로 대표성이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레바논의 시아파 공동체는 경제적으로도 매우 가난했다. 시아파 인구의 거의 85%가 남부 레바논의 농촌 지역과 베카 계곡의 일부 지역에 거주하며 주로 국영 담배 판매점에서 담배를 팔거나 채소를 재배하여 생계를 유지했다. 이러한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 많은 시아파 사람들이 베이루트 동부의 빈민가와 베이루트 남부 교외의 판자촌으로 이주했다. Hamzeh 교수에 따르면 ‘고통의 벨트’로 알려진 이들 지역은 1980년대에 시아파 무장 세력의 온상이 되었고 결국 헤즈볼라 탄생에 크게 기여했다.
c. 군사적 패배
이러한 “시아파의 정체성 위기와 소외에 더해 레바논이 1982년 이스라엘에 의해 침공을 당하고 이스라엘 군에 의해 점령되어 더욱 암울해졌을 때, 레바논 내에서 무장 세력의 결성 잠재력은 현저하게 증가했다. 군사적 패배에 이은 외국 군대의 자국 영토 점령은 정치 조직을 육성하거나 게릴라전을 펼치고 광범위한 풀뿌리 지지를 받는 무장 운동, 즉 헤즈볼라 창설의 길을 열어주었다”고 Hamzeh 교수는 주장했다.
이스라엘은 1978년(리타니 작전)과 1982년(레바논 전쟁)에 레바논을 침공했는데, Hamzeh 교수에 따르면 이러한 이스라엘의 군사 행동은 레바논 내에서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 PLO를 제거하고 레바논을 시리아의 영향력에서 분리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시리아와 PLO로부터 해방되어 기독교 세력이 주도하는 정권이 들어선 레바논이 평화를 가져오고 양국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만들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이러한 이스라엘의 군사 작전으로 레바논 남부에 거주하는 시아파가 엄청난 탄압을 받고 큰 희생을 겪었다. 이스라엘군은 1,000명이 넘는 시아파 민간인을 살해했고, 이로 인해 더 많은 시아파 난민들이 수도 베이루트 빈민가로 대거 이주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과 영토 점령은 “헤즈볼라 창설에 그 정당성을 부여하고 게릴라전을 정당화하는 정치·군사적 환경을 제공함으로써” 헤즈볼라의 입지를 강화시켜 주었다. 게다가 레바논에 주둔한 서방 군대, 특히 미국 해병대는 헤즈볼라의 입지를 더욱 강화시켰는데, 헤즈볼라는 외국 군대와의 전투를 이스라엘 점령군과의 전투만큼이나 정당한 것으로 여겼다.
d. 시위 효과 (1979년 시아파 이란 이슬람 혁명 성공의 영향)
Hamzeh 교수에 따르면, “1979년의 이란 혁명 성공은 레바논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두 나라는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지 않았지만, 레바논에서 오랜 고통을 겪어온 시아파들은 이란의 시아파 이슬람 혁명 성공과 메시지에 가장 크게 고무되었다.
레바논, 이라크, 이란의 시아파 성직자들, 특히 이란의 최고 지도자 호메이니는 이라크의 시아파 성지인 나자프에서 “학습 모임”에 참여하며 서로를 잘 알고 지냈다. 1979년 2월 1일 호메이니가 이란 혁명 발발로 이란으로 귀환한 직후, 그는 국내외 시아파의 절대적인 지도자이자 주요 이데올로그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1982년 8월 테헤란에서 열린 이슬람 운동 회의, 즉 소위 제1차 “억압받는 자들을 위한 회의”에서 급진적인 레바논 시아파 성직자(예: 셰이크 수브히 알-투파일리, 사이이드 압바스 알-무사위) 및 기타 급진주의자들을 만났다. 그 결과 이란 혁명에 고무된 레바논 시아파 성직자들은 헤즈볼라 결성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III. 헤즈볼라는 어떻게 레바논에서 막강한 힘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는가?
1. 개요
1982년에 결성해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헤즈볼라가 레바논 내에서 막강한 힘과 영향력을 갖게 된 것은 헤즈볼라의 막강한 군사력, 시아파 인구 속에 깊이 뿌리내린 정치적 기반, 헤즈볼라가 제공해 온 광범위한 사회복지 네트워크, 그리고 분열된 레바논 국가를 조종할 수 있게 해주는 헤즈볼라의 전략적 정치 동맹에서 비롯된다. 특히 시아파 인구는 레바논 내 최대 종파가 된 지 이미 오래다.
레바논은 공식적으로 18개의 종교 종파를 인정한다. 1932년 이후 레바논에서는 공식적인 인구 조사가 없었다. 하지만, 몇몇 인구 조사 추정에 따르면 레바논 인구의 약 65~70%는 무슬림(수니파와 시아파), 30%는 기독교인(주로 마론파와 그리스 정교회), 그리고 5%는 드루즈교도이다.
1932년 공식 인구 조사에 따르면 기독교인은 레바논 거주 인구의 50%를 차지했다. 당시 국가 기구를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던 기독교 종파 중 가장 큰 규모인 마론파는 전체 거주 인구의 29%를 차지했다.
1956년 레바논의 총인구는 1,411,000명으로 보고되었다. 그 중 가장 큰 종교 공동체는 기독교 마론파(424,000명), 수니파 무슬림(286,000명), 시아파 무슬림(250,000명), 그리스 정교회(149,000명), 그리스 가톨릭(91,000명), 드루즈파(88,000명), 아르메니아 정교회(64,000명), 아르메니아 가톨릭(15,000명), 개신교(14,000명), 유대교(7,000명), 시리아 가톨릭(6,000명), 시리아 정교회(5,000명), 라틴 교회(4,000명), 동방 교회 아시리아인(1,000명)이었다.
미국 국무부가 인용한 레바논 베이루트 소재 연구기관인 레바논 통계청이 2010년에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레바논 인구 약 430만 명의 종교 구성은 다음과 같이 추산되었다:
40.5%는 기독교인(마론파 21%, 그리스 정교회 8%, 멜키트 가톨릭 5%, 기타 소수 기독교 종파 (개신교, 아르메니아 정교회, 아르메니아 가톨릭, 시리아 정교회, 시리아 가톨릭, 로마 가톨릭, 칼데아 가톨릭, 아시리아 동방 교회, 콥트교) 6.5%.
54%는 이슬람교인(시아파 27%, 수니파, 알라위파, 이스마일파 27%).
5.6%는 드루즈교인(레바논 헌법상 무슬림에 포함). 이 외에도 바하이교, 불교, 힌두교, 유대교, 모르몬교 등 소수 종교 집단이 있다.
2023년 미국 국무부는 레바논 통계청이 실시한 연구를 인용하여 레바논 인구의 69.3%가 무슬림(시아파 32.2%, 수니파 31.2%, 드루즈파 5.5%, 알라위파와 이스마일파 합계 0.6%)이고 30.5%가 기독교인이라고 추산했다.
기독교인의 52.5%는 마론파이고 25%는 그리스 정교회 신자이며, 그 외 기독교 종파로는 그리스 정교회(멜키파), 아르메니아 정교회, 아르메니아 가톨릭, 시리아 정교회, 시리아 가톨릭, 아시리아 정교회, 칼데아 가톨릭, 콥트교, 개신교(장로교, 침례교, 제칠일안식일교회 포함), 로마 가톨릭(라틴 가톨릭), 예수 그리스도 교회 신자들이 있다.
2023년 인구 조사에서 드러난 것처럼 시아파가 레바논 인구의 32% 이상을 차지하며 최대 종파인 이유로 이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는 헤즈볼라가 레바논 내에서 강력한 힘과 영향력을 갖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수 있다. 이러한 인구통계학적인 이유 이외에 구체적으로 헤즈볼라가 레바논 내에서 강력한 힘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해 주는 주요 요인은 다음과 같다:
a. 정치적 힘과 영향력: 헤즈볼라는 1992년 총선에 참가한 이후 공식적인 정치 참여자로서 레바논 의회에 의석을 가지고 있으며 내각에도 참여해 왔다, 헤즈볼라는 레바논 정치를 이끌어왔던 핵심 세력인 ‘3월 8일 동맹’의 중요 일원이다. 이러한 정치적 지위와 전략적 정치동맹을 통해 헤즈볼라는 레바논의 주요 국가적 결정에 대한 사실상의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b. 군사적 우위: 이란의 지원을 받는 헤즈볼라는 레바논 정규군을 능가하는 무기를 보유한 중동 지역 내 가장 강력한 비(非)국가 행위자로 활동한다. 헤즈볼라의 군사력은 레바논 내 경쟁 세력이 그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억제하는 강력한 배경을 제공한다.
c. 복지 및 사회 서비스 제공: 헤즈볼라는 자체적으로 의료 시설, 학교, 재건 프로그램 등 방대한 규모의 사회 복지 및 기반 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 안전망은 헤즈볼라가 시아파 공동체 내에서 주민들로부터 강력한 충성심을 구축하는 데 기여하며, 레바논 중앙 정부가 역사적으로 어려움을 겪어온 이 분야에서 헤즈볼라가 유능한 공급자라는 이미지를 심어준다.
d. 종파 간 권력 분담 체제: 레바논의 정치 체제는 종파별로 분열되어 있어 이로 인해 중앙 정부가 취약하고 분열되어 있으며 부패에 쉽게 굴복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 헤즈볼라는 이러한 구조적 약점을 이용하여 엘리트 간의 담합과 다른 파벌(기독교 정당 포함)과의 공식, 비공식적 동맹을 통해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하고 있다.
e. 저항 이념: 헤즈볼라는 레바논 남부 지역에 대한 이스라엘의 점령에 저항해 온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국내에서 상당한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다. 지지자들에게 헤즈볼라는 자신들을 보호해주는 필수적인 방어 세력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헤즈볼라로 부터 무기를 빼앗으려는 비무장화 시도를 어렵게 만든다.
2. 헤즈볼라의 정치적 힘과 영향력
지난 20년간 레바논에서는 두 주요 정치 집단, 즉 ‘3월 8일 동맹’과 ‘3월 14일 동맹’이 권력을 두고 자웅을 겨뤄왔다. 두 동맹 모두 전통적으로 기독교인과 무슬림 구성원이 혼합되어 있다. 두 집단 간의 중요한 정치적 차이점은 외교 관계에서 잘 드러난다. 헤즈볼라와 아말 운동을 포함한 시아파와 기독교 구성원으로 구성된 ‘3월 8일 동맹’은 시리아 및 이란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선호하는 반면, 기독교인과 수니파 구성원이 더 많은 ‘3월 14일 동맹’은 일반적으로 미국, 프랑스,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긴밀한 관계를 추구한다.
2009년 이후 처음으로 실시된 2018년 총선에서 ‘3월 8일 동맹’은 128석 중 76석(60%)을 확보하며 승리해 집권 세력이 되었다.
‘3월 8일 동맹’은 2019년 레바논 내각에서 30명의 장관 중 18명(60%)을 차지하며 의회와 내각 모두를 지배했다. 2021년 내각에서 ‘3월 8일 동맹’은 24명의 장관 중 16명(66%)을 차지했다.
그러나 그림 2에서 볼 수 있듯이, ‘3월 8일 동맹’은 2022년 총선에서 128석 중 61석(47%)을 확보하는 데 그쳐 의회 과반수를 잃었지만 국회의장 선거에서는 승리했다.

그림 2: 2022년 총선 결과 레바논의 분열된 의회 (출처: CFR)
레바논에서 중요한 전환점은 2025년에 일어났는데, 이는 2024년 이스라엘과의 휴전 협정 이후 헤즈볼라의 영향력이 얼마나 약화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2022년 총선에서 과반 연립정부 구성에 실패하면서 레바논은 2년 넘게 정치적으로 마비 상태에 빠졌다. 헤즈볼라와 그 정치적 파트너들이 총리 후보자 합의를 막고 투표를 방해한 것이 그 원인이었다. 그러나 이 오랜 정치적 교착 상태는 2025년 초 의회에서 과반수 의석을 확보한 베테랑 군 사령관 조셉 아운이 대통령으로, 저명한 변호사이자 외교관인 나와프 살람이 총리로 선출되면서 해소되었다. 중동지역 분석가들은 이러한 전문가 출신 지도자들의 선출이 헤즈볼라의 영향력 약화를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한다. 헤즈볼라는 오랫동안 조셉 아운의 대통령 당선을 반대해 왔지만, 레바논 재건에 절실히 필요한 국제 원조를 확보하기 위해 그의 후보 지명을 수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월 8일 동맹’의 핵심 구성원인 헤즈볼라는 아말 운동과 함께 레바논 최대 종교 집단인 시아파 공동체를 대표하는 두 주요 정당 중 하나이다. 아말 운동은 자신의 정치적 수단을 통해 정치 활동을 수행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우고 있지만, 필요에 따라선 헤즈볼라를 지원하는 부분적인 전투 세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헤즈볼라는 1992년부터 총선에 참가해 왔고, 2005년 11월부터는 레바논 정부의 일원으로 내각에 참여해 왔다.
저항 블록 (the Loyalty to Resistance Bloc)은 레바논 의회에서 활동하는 헤즈볼라의 정치 조직이다. 그림 3이 보여주듯 헤즈볼라는 이 저항 블록을 통해 1992년 레바논 총선에서 128석 중 12석을 차지한 이후 레바논 의회에 의석을 확보해 왔다. 헤즈볼라는 1996년 총선에서 7석, 2000년 총선에서 10석을 얻었다.
저항 블록과 아말 운동은 ‘3월 8일 동맹’을 결성하여 주도권을 쥐고 있다. 2005년 총선에서 이 연합 세력은 27.3%의 의석을 확보했는데, 헤즈볼라와 아말 운동은 각각 14석을 얻었다. 특히 시아파가 강한 남부 레바논에서는 23석을 모두 차지했다. 이 두 시아파 정당은 2005년 11월부터 레바논의 집권 정부인 국민통합정부에 참여해 왔다. 헤즈볼라는 2005년 내각에서 두 명의 장관을 배출했고, 아말 운동은 세 명의 장관을 배출했다.
2009년 총선에서는 헤즈볼라가 12석, 아말 운동이 13석을 얻었다. 2018년 총선에서는 헤즈볼라가 13석, 아말 운동이 16석을 얻었다. 현재 저항 블록은 헤즈볼라 소속이자 저명한 시아파 정치인인 모하마드 라드(Mohammad Raad)가 이끌고 있다.

그림 3: 역대 레바논 의회에서 헤즈볼라가 차지한 의석 수 (출처: wikipedia)
2005년 11월부터 헤즈볼라가 내각에 참여해 온 레바논 정부들은 다음과 같다.
2005년 Siniora 정부
Fouad Siniora는 2005년 7월, 미셸 아운 장군이 이끄는 자유애국운동(FPM) 블록을 제외하고 레바논 의회의 주요 정당들을 모두 아우르는 국민통합정부를 구성했다. 헤즈볼라는 처음으로 내각에 참여하여 30개 장관직 중 2개를 차지했다. 헤즈볼라는 자신의 군사력 유지에 대한 보장을 받는 조건으로 2005년 국민통합정부에 참여했지만, Siniora 정부의 주축인 ‘3월 14일 동맹’의 패권주의적 야욕에 강력히 반대하는 입장을 유지해 왔다.
반면, ‘3월 14일 동맹’에서 탈퇴한 자유애국운동(FPM)과 헤즈볼라는 ‘3월 14일 동맹’의 패권 장악 시도에 맞서기 위해 동맹을 맺었다. 2006년 2월, 수주간의 협상 끝에 미셸 아운과 하산 나스랄라는 후보자들의 언론 접근권에 대한 평등한 보장으로부터 외국인 투표권 허용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개혁을 요구하는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이 개혁은 하리리-줌블라트 연립정부의 권력 장악을 뒷받침하는 불균형적인 정치 환경을 바로잡는 것을 목표로 했다. 자유애국운동(FPM)과 헤즈볼라가 체결한 이 양해각서는 시아파 공동체에서 거의 만장일치에 가까운 지지를 얻었으며, 베이루트 정보연구센터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기독교 공동체에서도 77%의 지지를 받았다. 이 양해각서는 비례대표제를 포함한 선거법 개혁을 요구했다.
헤즈볼라와 아말 운동 등 내각에 포진한 시아파 출신 장관 5명은 Siniora 총리가 2005년 2월 14일에 암살된 라피크 하리리의 암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한 레바논 특별재판소 설립에 관한 유엔 초안에 동의하자 2006년 11월 11일 사임했다. 이 특별재판소는 레바논 군부의 위삼 알-하산 장군이 수행한 조사와 함께 헤즈볼라가 이 암살에 책임이 있다는 강력한 증거를 발견했다.
2008년 Siniora 정부
2008년 Fouad Siniora가 이끌었던 또 다른 국민통합 정부에서 헤즈볼라와 아말 운동은 각각 2명의 장관을 30명으로 구성된 내각에 포진시켰다. 특히 헤즈볼라에서는 무함마드 프네이시가, 아말 운동에서는 파우지 살루크가 장관을 맡았는데, 파우지 살루크는 헤즈볼라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2011년 Mikati 정부
2011년 Najib Mikati가 이끌었던 국민통합 정부에서도 헤즈볼라와 아말 운동은 30명으로 구성된 내각에 각각 2명의 장관을 배출했다. 헤즈볼라 장관은 후세인 하지 하산과 무함마드 프네이시였다.
2013년 Salam 정부
2013년 4월 Tammam Salam이 이끌었던 국민통합 정부에서도 헤즈볼라와 아말 운동은 각각 2명의 장관을 24명으로 구성된 내각에 배출했다. 헤즈볼라 소속 장관은 후세인 하지 하산과 무함마드 프네이시였다.
2016년 Hariri 정부
2016년 12월 Saad Hariri가 이끄는 국민통합정부에서 헤즈볼라는 30명으로 구성된 내각에 2명의 장관을, 아말 운동은 3명의 장관을 배출했다. 헤즈볼라 소속 장관은 후세인 하지 하산과 무함마드 프네이시였다.
2019년 Hariri 정부
2019년 1월 역시 Saad Hariri가 이끄는 국민통합정부에서 헤즈볼라는 30명으로 구성된 내각에 2명의 장관을, 아말 운동은 3명의 장관을 배출했다. 헤즈볼라 소속 장관은 무함마드 프네이시와 마흐무드 크마티였다. 대규모 시위가 발생해 정부는 2019년 10월 29일에 사퇴할 수밖에 없었다.
2020년 Diab 정부
2020년 1월, Hassan Diab가 이끄는 국민통합정부가 구성되었다. 이 정부에서 내각은 20명으로 구성되었는데 아말 운동과 헤즈볼라은 각각 2명의 장관을 배출했다. 하마드 하산과 이마드 호발라가 헤즈볼라 출신 장관이었다. 2020년 8월 10일, 정부는 6일 전 베이루트에서 발생한 폭발 사건에 대한 대중의 분노로 인해 사퇴했다.
2021년 Mikati 정부
2021년 9월 Najib Mikati가 이끄는 국민통합정부에서 아말 운동은 3명의 장관을, 헤즈볼라는 2명의 장관을 배출했다. 알리 하미예와 무스타파 바이람이 헤즈볼라 출신 장관이었다.
요약하면, 레바논 정치를 주도하는 양대 세력 중 하나인 ‘3월 8일 동맹’의 핵심 구성원으로서 그리고 2005년 Siniora 정부부터 레바논 정부 내각 구성원으로 참여함으로써 헤즈볼라는 레바논에서 막강한 정치적 힘과 영향력을 발휘해 왔다.
3. 헤즈볼라의 막강한 군사력
헤즈볼라는 이란으로부터 수십 년간 지속적으로 제공받은 막대한 재정 및 기술 지원, 광범위한 국경 무기 밀수 네트워크, 그리고 레바논 국가 체제 내에 깊숙이 뿌리내린 단체라는 독특한 지위를 통해 막강한 군사력을 구축해 왔다. 헤즈볼라는 군사력 면에서 레바논 정규군과 비슷하거나 더 강하다고 널리 알려져 있다.
헤즈볼라가 이렇게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게 된 주요 요인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이란의 지원이다. 이란 혁명수비대(IRGC)는 헤즈볼라에 매년 약 7억 달러에 달하는 자금, 무기, 전문 훈련을 제공해 왔다. 그림 4가 보여주듯 이러한 지원을 통해 헤즈볼라는 수만 발의 로켓, 첨단 드론, 정밀 유도 미사일 등 방대한 무기고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림 4가 보여주듯 이스라엘 Alma 연구교육센터에 따르면, 2023년 10월 기준 헤즈볼라는 최대 80km까지 날아갈 수 있는 로켓 65000기, 80km에서 최대 200km까지 날아갈 수 있는 로켓 및 미사일 5000기, 200km-700km 까지 날아갈 수 있는 미사일 5000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무인 드론 2500기, 그리고 박격포 등 각종 포 150000문을 보유하고 있다.
헤즈볼라가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게 된 둘째 요인은 헤즈볼라에게 무기를 보급하는 수송로 및 지하 터널 네트워크를 들 수 있다. 헤즈볼라에게 제공되는 무기와 첨단 군사 기술은 이란에서 이라크와 시리아를 거쳐 레바논으로 정기적으로 밀수되어 왔다. 헤즈볼라는 이러한 물자를 보급받고 또 활용하여 자신들의 군사 기반 시설을 은폐하고 보호하기 위해 정교하게 지하 벙커와 터널 네트워크를 개발, 구축했다.
그림 5가 보여주듯 2024년 12월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 붕괴 이전 헤즈볼라는 이란에서 이라크를 거쳐 시리아와 레바논으로 이어지는 육로 수송이나 시리아 공항을 통한 항공 밀수 등 무기 밀수 경로를 통해 이란으로부터 무기를 공급받았다. 그러나 아사드 정권 붕괴 후 정권을 잡은 수니파 성향의 알 샤라 현 정권은 걸프 국가와 서방으로부터 재건 투자를 유치하려는 분

그림 4: 2023년 10월 6일 현재 헤즈볼라 무기 현황 (출처: 이스라엘 Alma 연구교육센터)
명한 의지를 보였고, 이에 따라 시리아는 과거 헤즈볼라 등 시아파 세력에게 우호적인 환경에서 적대적인 지역으로 변모했다.
이란이 이라크와 시리아를 거쳐 헤즈볼라에 무기, 자금, 인력을 공급하는 데 사용했던 전통적인 이란 육로(陸路), 흔히 “육로교 (Iranian Land corridor)”라고 불리는 경로는 2024년 12월 아사드 정권 붕괴 이전 이란 국경에서 시작하여 이라크(Al-Qaim 국경 검문소 경유)를 거쳐 시리아 중부를 가로질러 지중해 연안과 레바논 남부까지 1,500km 이상 뻗어 있었다. 주요 무기 밀수 통로는 시리아 Homs와 레바논 베카 계곡 (Bekaa Valley)을 연결하는 Al Qusayr 회랑이었다. 이 회랑에는 헤즈볼라 4400부대가 운영하던 3km 길이의 주요 지하 터널과 같은 전략적 밀수 네트워크와 터널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사드 정권 붕괴 후 집권한 알 샤라 시리아 정부는 Al Qusayr 회랑과 같은 기존 무기 밀수 통로를 폐쇄하는 데 적극 협력해 불법 무기의 시리아 국경 통과를 적극적으로 제한했다. 레바논의 새 아운 정부 역시 이란 항공기의 베이루트 하리리 국제공항 착륙을 금지하였다. 이로 인해 이란과 헤즈볼라 등 그 대리 세력은 무기 보급로를 재검토해야 했다.
현재 이란은 지역 내 동맹 무장 세력들을 지원하기 위해 새로운 은밀한 대체 경로를 계속해서 모색해 왔다. 그림 6이 보여주듯 헤즈볼라는 시리아를 통한 육로 밀수 시도와 함께 주로 해상으로 추정되는 대체 보급로 구축을 시도해 왔다.

그림 5: 이란 육로 회랑 (출처: 이스라엘 Alma 연구교육센터)
이란이 활용하는 새 대체 경로는 시리아 해안으로의 해상 수송, 터키 또는 요르단을 경유하는 육로 수송, 시리아로의 항공편 수송 후 레바논으로의 현지 트럭 수송 등이 있다. 워싱턴 연구소의 마이클 나이츠에 따르면, 아사드 정권 이후의 잠재적 대체 공급 경로 중 다음의 네 가지 경로가 두드러진다.
a. 이라크를 경유하여 시리아 중부를 거쳐 레바논까지 육로 트럭 운송을 계속하는 방법.
b. 다른 육로 경로: 이라크, 요르단, 시리아 남부를 경유하는 경로 또는 이라크, 터키, 시리아 북부를 경유하는 경로.
c. 시리아 지중해 연안까지 해상 운송 후 레바논까지 트럭으로 운송하는 방법.
d. 시리아까지 항공편으로 수송 후 레바논까지 트럭으로 운송하는 방법.

그림 6: 헤즈볼라로 향하는 새 무기 밀수 회랑인 New Iranian corridor (출처: 이스라엘 Alma 연구교육센터)
새로운 무기 밀수 수송로 구축 시도와 함께 무기 밀수 능력이 크게 약화됨에 따라 헤즈볼라는 레바논 현지에서 무기 생산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으로 이스라엘은 파악하고 있다.
이스라엘 Alma 연구교육센터는 헤즈볼라의 자립적 무기 생산으로의 자세 전환은 이란이 대리 무장 세력을 지원하는 전략에 있어 병행적인 변화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Alma 연구교육센터에 따르면 2013년에서 2015년 사이에는 시리아를 경유하여 레바논의 헤즈볼라에 완제품 무기 체계를 직접 이전하는 방식이 특징이었다. 이러한 밀반입 시도는 상당 부분 저지되었다. 2016년, 이란과 헤즈볼라는 레바논에 있는 헤즈볼라의 무기고에 있는 기존 로켓을 정밀 미사일로 개조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 계획의 일환으로 이란은 시리아 북서부의 SERS 단지에서 비(非)유도 로켓을 생산하고, 정밀 부품들을 별도로 레바논으로 밀반입했다. 레바논에서는 이란의 기술팀이 베이루트를 비롯한 여러 지역의 시설에서 이 로켓들을 정밀 무기로 개조했다. 이어 이란과 헤즈볼라는 2019년부터 레바논 영토 내에서 정밀 미사일을 생산하고 정밀 개조 시설을 구축하는 야심찬 계획을 시작했다. 이미 2019년 9월, 이스라엘 방위군(IDF)은 베카 지역 나비칫(Nabi Chit)에서 헤즈볼라의 정밀 미사일 제조 시설을 적발했다.
헤즈볼라가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게 된 셋째 주요 요인은 헤즈볼라의 전술적 적응력을 들 수 있다. 헤즈볼라는 잘 훈련되고 교육 수준이 높은 전투원들을 기반으로 하며, 이들은 지속적으로 전술을 현대화해 왔다. 그 결과 헤즈볼라는 게릴라전, 대전차 유도 미사일, 1인칭 시점(FPV) 드론 등을 활용하여 이스라엘의 대규모 정규군에 대응해 왔다. 또 헤즈볼라는 2012년부터 시리아 내전에서 상당한 현대전 전투 경험을 쌓았다.
4. 광범위한 사회 복지 및 재건 사업의 제공자로서 헤즈볼라
레바논 내 헤즈볼라의 강력한 힘과 영향력은 헤즈볼라가 가지고 있는 강력한 사회 복지 시스템에서 나온다. 헤즈볼라는 레바논 시아파 공동체 내에 광범위한 사회 복지 네트워크를 유지하고 있다. 이 네트워크들은 의료, 교육, 금융, 복지, 통신 분야를 담당한다. 이 네트워크들은 헤즈볼라의 군사 기반 시설을 지원하는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헤즈볼라의 이념을 전파하고 시아파 공동체 및 레바논 사회 전반에서 헤즈볼라의 입지를 강화하는 수단으로도 활용된다. 이 네트워크들은 레바논 정부의 취약성과 정부의 시아파 공동체에 대한 오랜 무관심과 방치를 악용하여, 일반적으로 국가가 제공하는 대규모 사회적 서비스를 시아파 공동체에 제공한다. 따라서 헤즈볼라는 시아파 인구가 많이 거주하는 레바논의 상당 지역에서 “국가 안의 국가”로 존재하며, 자신들의 군사 기반 시설을 주민들 사이에 숨기고 배치할 수 있다.
헤즈볼라가 설립한 주요 사회 복지 기관으로는 이슬람 자선 위원회인 엠다드(Emdad), 헤즈볼라 중앙 언론 사무소, 알 자르하 협회(Al Jarha Association), 지하드 알 비나 개발 협회(Jihad Al Binaa Developmental Association) 등이 있다. 지하드 알 비나 재건 캠페인은 레바논에서 수많은 경제 및 사회기반시설 개발 프로젝트를 담당하고 있다. 헤즈볼라는 분쟁에 참여했다 사망한 전사자 유가족에게 생활비와 교육비를 지원하는 순교자 유족 지원 기관(알 샤히드 사회 협회)을 설립했다.
구체적으로 헤즈볼라의 주요 사회 복지 네트워크는 다음과 같다:
- 의료: 이슬람 보건청은 레바논 전역에 병원, 치과, 이동 진료소 네트워크를 운영하며 무료 또는 대폭 할인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한다.
- 교육: 교육 부서는 장학금을 제공하고, 직업 학교를 운영하며, 학생들에게 매일 식사와 교통편을 제공한다. 또한 청소년 개발을 위한 이맘 알 마흐디 스카우트도 운영한다.
- 사회기반시설 및 농업: 지하드 알 비나 개발 협회는 파괴되거나 손상된 사회기반시설을 재건하고, 농촌 개발을 조정하며, 환경 프로젝트를 관리한다.
- 금융 서비스: 알카르드 알하산 재단은 이슬람 금융 원칙에 기반한 무이자 소액 대출을 제공하는 준(準)은행 시스템처럼 운영된다.
- 순교자 및 부상자 기금: 순교자 연구소(알샤히드)와 알자르하 재단과 같은 전문 기관들은 전쟁에서 전사하거나 부상당한 대원들의 가족에게 생활비, 주택비, 교육비를 보장한다.
전략적 영향 및 기능: 헤즈볼라의 사회 복지 서비스는 특히 심각한 경제 붕괴 이후 위기 상황에서 많은 레바논 시민들에게 필수적인 생존 메커니즘 역할을 해 왔다. 이 방대한 민간 기구는 두 가지 목적을 수행한다. 국가 역량 부족을 보완함으로써 시아파 공동체 내에 깊은 충성심과 풀뿌리 의존성을 구축하는 동시에, 헤즈볼라의 광범위한 사회정치적, 이념적 목표를 강화하는 “국가 안의 국가” 구조를 만들어낸다.
군사적, 정치적 측면에서, 특히 2025년 1월 조셉 아운 대통령 당선 이후 여러 차례의 좌절에도 불구하고, 헤즈볼라는 여전히 강력한 대중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러한 영향력은 주로 헤즈볼라가 가진 강력한 무기 보유량에 있는 것이 아니라, 레바논 국가가 제대로 제공하지 못하는 광범위한 사회 서비스 네트워크에 기반하고 있다.
헤즈볼라가 교육, 의료, 전력 공급, 사회복지 등 핵심적인 국가 기능을 계속 수행하는 한, 헤즈볼라는 레바논 내에서 그 영향력을 유지하고, 충성심을 확보하며, 국가의 정당성을 약화시킬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운 새 정부가 직면한 핵심 과제이다. 레바논 현 정부는 선거에서 헤즈볼라에 정치적 패배를 안겨주었지만, 헤즈볼라의 진정한 정당성의 원천인, 오랫동안 국가의 방치 속에 살아온 소외된 공동체에 뿌리내린 사회 복지 서비스 네트워크를 완전히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지하드 알-비나, 이슬람 보건청, 이맘 알-마흐디 스카우트와 같은 기관들을 통해 헤즈볼라는 사회 기반 시설, 교육,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동시에 준(準)군사 훈련을 실시하고 청년들을 자신들의 문화 및 이념 체계에 뿌리내리게 해왔다.
National Interest의 보고서에 따르면, 아운의 대통령 당선이 헤즈볼라 세력의 약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의미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2025년 5월 실시된 지방 선거는 헤즈볼라의 견고한 사회적 기반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헤즈볼라-아말 운동 연합은 272개 지방자치단체 중에서 레바논 남부와 남부 교외 지역의 주요 거점들을 휩쓸며 나바티에와 남부 주 등의 109개 지자체를 장악했다.
헤즈볼라는 베이루트, 바알베크-헤르멜, 그리고 남부 레바논에서 치러진 지방자치단체 및 시장 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것을 사실상 “쓰나미”에 비유하며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이러한 강력 헤즈볼라의 지배력은 국가 부패와 만성적인 제도적 실패라는 비옥한 토양에서 번성해 왔다. 재정난에 허덕이는 레바논 정부는 더 이상 공공 부문 급여를 안정적으로 지급하거나 병원과 학교를 유지할 수 없어 걸프 국가들과 세계은행의 외부 원조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이러한 국가 기능 공백을 틈타 헤즈볼라는 공공 서비스 제공을 정치적, 사회적 수단으로 활용하며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IV. 결론
본 논문은 다음의 두 가지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고자 하였다: 첫째, 이란의 지원을 받는 헤즈볼라는 어떻게 레바논에서 탄생했는가?; 둘째, 헤즈볼라는 어떻게 레바논의 합법 정부와 정규군의 제재 없이 이스라엘과 같은 외국에 대한 군사 공격을 자유롭게 감행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정치적, 군사적 힘과 영향력을 레바논에서 가질 수 있었나?
첫 번째 질문과 관련하여, 본 논문은 헤즈볼라가 레바논의 시아파 공동체에서 자생적으로 성장했으며, 다음의 네 가지 위기 상황이 헤즈볼라의 출현을 촉발했다고 주장했다. (i) 정체성 위기와 소외; (ii) 레바논 내 구조적 불균형; (iii)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과 레바논의 군사적 패배; (iv) 시위 효과(이란 이슬람 혁명 성공).
두 번째 질문과 관련하여, 본 논문은 헤즈볼라가 레바논에서 막강한 힘과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던 비결로 헤즈볼라의 막강한 군사력 보유, 시아파 인구에 깊이 뿌리내린 정치적 기반, 헤즈볼라가 제공하는 광범위한 사회복지 네트워크, 그리고 분열된 레바논 국가를 조종할 수 있게 해주는 헤즈볼라의 전략적 정치 동맹을 꼽았다. 특히, 시아파는 오랫동안 레바논에서 가장 큰 종교 집단이어서 막강한 힘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본 논문은 헤즈볼라가 레바논 정치의 두 주요 세력 중 하나인 ‘3월 8일 동맹’의 핵심 구성원으로서, 그리고 2005년 시니오라 정부 이후 레바논 정부 내각의 일원으로서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고 주장했다.
또한, 헤즈볼라는 군사력 면에서 레바논 정규군과 동등하거나 그보다 강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 이유로는 헤즈볼라의 뛰어난 규율, 풍부한 경험, 그리고 우월한 무기가 꼽힌다. 본 논문은 헤즈볼라가 막강한 군사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 주요 요인으로 이란으로부터 수십 년간 축적된 막대한 재정 및 기술 지원과 광범위한 국경 밀수 네트워크를 꼽았다.
이밖에 본 논문은 헤즈볼라의 강력한 힘과 레바논 내 영향력이 헤즈볼라가 오랜 기간 제공해 온 광범위한 사회복지 시스템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하였다. 헤즈볼라는 레바논 시아파 공동체 내에 광범위한 사회복지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이 네트워크는 의료, 교육, 금융, 복지, 통신 등 다양한 분야를 포괄하는데. 이 네트워크는 헤즈볼라의 군사 기반을 지원할 뿐만 아니라, 헤즈볼라의 이념을 전파하고 시아파 공동체 및 레바논 사회 전반에서 헤즈볼라의 입지를 강화하는 수단으로도 활용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