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은 이미 두 나라의 정치 지도자들 사이에서도 전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사실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이러한 균열은 양국 간 긴장이 고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양국 간 균열이 유럽 안정에 주요한 관심사로 만드는 데 기여하는 근본적인 요인이 있다. 우리는 아래의 4가지 요소를 지적한다:
전략적 요소
지리는 전략적 선택을 결정한다. 독일은 항상 자신의 동쪽에 위치한 세력을 우려의 대상이자 기회의 대상으로 삼았다. 독일은 거의 항상 자신의 동쪽에 위치한 세력보다 강력했다. 전쟁은 역사적으로 각 역사적 단계에 존재했던 정치 체제에 관계없이 러시아와의 공존을 조건으로 삼았다.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독일이 러시아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결코 승리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반면, 평화를 논의할 때에는 독일의 이익이 늘 지배했다. 따라서 베를린(또는 1차 냉전 당시 본)에서는 항상 러시아에 대해서는 유화적인 입장을 보였다. 이전 히틀러는 전략적 협정(1939년)이 아닌 전술적 협정 체결로, 시간을 벌고 서유럽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스탈린의 러시아와의 불가피한 대결을 연기하기를 원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소련의 승리로 독일은 거의 반세기 동안 분단을 겪었고, 이것은 독일에게 이전보다 훨씬 더 굴욕적인 형벌이었다. 서독은 번영했고, 반면 동독은 침체됐다. 그러나 이러한 서독의 승리는 화해를 촉진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1970년대 초 ‘동방정책’을 시작했을 때 그는 이를 매우 잘 이해했다. 이 ‘동방정책’은 미국으로 부터 우려를 불러일으켰는데, 이것은 미국이 해빙 자체에 반대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과정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할 위험 때문이었다. 프랑스에서도 ‘동방정책’에 대한 약간의 거부감이 있었다. 드골 대통령과 그의 후계자들은 항상 소련과 협력할 수 있는 통로를 유지해 왔지만 독일의 제안은 불신했다.
소련 체제의 위기와 함께 프랑스와 독일의 긴장이 다시 표면화되었다. 통일되고 강력한 독일은 프랑스에 세 번째의 파괴적인 전쟁의 유령을 일깨웠다. 당시 총리였던 콜(Kohl)은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의 주요 지지자였으며, 곤경에 처해 있던 소련을 위한 후원자 역할을 했다. 평화와 유럽 통합에 대한 독일의 반복적인 약속은 새로운 정치적, 영토적 세력으로서의 독일의 경제적 무게로 인해 ‘독일화된’ 동유럽의 비전에 대한 충분한 해독제로 보이지 않았다. 유고슬라비아 내전에서 독일의 행동은 처음 프랑스에서 ‘다이너마이트’로 인식되었고 이후 그러한 두려움을 더욱 증가시키는 데 기여했다.
서구에서 부추긴 약탈적 자본주의로 인해 ‘새로운’ 러시아에서 민주화가 실패한 이후, 독일은 바람직하지 않은 러시아의 표류를 막기 위해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연속적인 위기로 이 전략적 프로젝트가 중단될 때까지 러시아와 매우 긴밀한 관계를 계속 구축했다.
프랑스에서는 독일이나 미국과 협력하든 그에 상관없이 러시아와의 자율적 관계에 항상 관심이 있었지만 결코 러시아에 종속적이지 않았다. 드골 민족주의는 우파와 좌파 모두에서 살아남았다. 어쨌든 프랑스 엘리트들은 협력이든 대결이든, 러시아과의 관계에서 프랑스가 부차적인 역할을 하는 것을 피하려고 노력해 왔다.
따라서 마크롱(‘교황보다 더 교황주의자, 드골 장군보다 더 드골주의자’)프랑스 대통령은 2014년 크름 반도에 대한 유령식 개입과 돈바스에서 더 명백한 개입 이후 푸틴과 위험한 중재 게임을 시도할 것이다. 그리고 8년 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시작되었을 때. 프랑스 대통령의 모스크바 방문의 진짜 의도에 대해 많은 추측이 있었다. 마크롱은 결코 순진하지 않다. 아마도 엘리제궁은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것을 원했을 수 있다.
러시아와의 화해가 멀어보이기 때문에 마크롱 대통령은 비록 연합국 간 합의는 없지만 러시아의 군사적 승리를 막기 위해 우크라이나에 군인들을 파견하는 것을 배제할 수 없다고 제안함으로써 이제 ‘매파’ 중에서도 그 선두를 차지하고 있어 그가 한때 ‘비둘기파’처럼 보이고 싶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척한다. 이것은 마크롱 대통령의 모든 책략 중에서 가장 위험한 책략 중 하나였고 마크롱은 라인강 반대편에서 가장 큰 짜증을 불러일으켰던 바로 그 사람이 되었다.
2022년 2월 이후 독일은 ‘동방정책’의 다양한 부문을 묻어버렸는 데 이 임무는 아마도 가장 눈에 띄지 않고 또 고위급 리더십에 가장 적합하지 않은 사민당 출신 총리에게 맡겨진 임무일 것이다. 올라프 숄츠(Olaf Scholz)독일 총리는 ‘zeitenwende’(시대 또는 시간의 변화로 번역됨)를 발표했다. 러시아와의 반세기에 걸친 화해가 의문시 되었다. 독-러 양국 관계의 경제 방정식(기계 및 자본재와 교환되는 에너지 원자재)은 러시아에 대한 서방의 제재로 인해 해체되고 있었다. 더욱이, 히틀러 이후의 평화주의 독일은 독일 군사 제도와 기구의 활력을 되찾고, 강화하며, 확장하는 것을 목표로 1,000억 달러를 약속했다.
그러나 모든 것에는 한계가 있고 금지선이 있다. 독일은 러시아의 석유 및 가스 소비에 대한 금수 조치, 제한으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유럽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푸틴 대통령에게 대담함을 잃지 않았다. 독일에서는 러시아와의 경제전쟁이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특히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공급에 있어서는 주의와 소심함이 기울여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미국 다음으로 우크라이나에 많은 무기를 제공한 국가이며 그러한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프랑스도 지난 2년 동안 만연한 수사(修辭)와 냉전식 선전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마찬가지로 크렘린궁에 압력을 가하는 데 있어 조심스러운 조치를 취했다. 이것이 바로 마크롱의 최근 ‘도발’이 독일을 그토록 짜증나게 만든 이유다. 더욱이 프랑스 대통령은 늘 자랑하듯이 우크라이나의 취약성 때문에 동맹국들에게 더 많은 “용기”와 덜 소심한 태도가 필요하다는 점을 시사해 모욕을 더했다.
숄츠 총리는 나토의 결정이 ‘지상 부츠’(우크라이나에 군 파견)를 배제했다는 점을 상기하면서 외교적, 관료적 방식으로 이에 반응했다. 그러나 독일 국방장관인 피스토리우스는 마크롱의 새로운 도덕적 교훈에 대해 보답하고 그를 훈계하는 것을 거부할 수 없었다. 양국 외교장관은 위기상황을 ‘외교적’으로 해결하려 시도했다.
나중에 독일과 프랑스 사이의 정치적 상처가 여전히 아물지 않았음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양국 외교 장관은 공동 기자 회견을 열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다. 하지만 러시아 요원들이 염탐한 독일 고위 군 사령관들의 회의가 유출되면서 분위기가 더욱 흐려졌다.
냉전 이후 변하지 않은 또 다른 요소: 독일은 유럽의 자율적 방위 프로젝트를 지지할 수 있지만 이 프로젝트가 나토에 종속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미국의 핵우산은 그때나 지금이나 건드릴 수 없다. 그리고 프랑스 핵무기의 궁극적인(그리고 현재로서는 추측에 불과한) 전략적 가용성조차도 그러한 원칙을 바꿀 수 없다.
정치적 요소
이번 위기에는 전략적 고려 외에도 국내 정치적 요인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극우 정당 ‘국민연합’의 불가피해 보이는 승리를 우려하면서 유럽 선거에 직면해 있다. ‘국민연합’은 한때 친러시아 정당으로 간주됐고 심지어 크렘린으로부터 넉넉한 자금을 지원받기도 했다. 최근 몇 년 동안 ‘국민연합’ 당 대표는 크렘린과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지만 완전히 성공하지 못했다. 그리고 마크롱은 대통령 선거에서 두 번이나 그에게 패배했지만 올해 유럽 선거에서 성공적인 결과를 얻으면 2027년 엘리제궁을 차지할 것처럼 보이는 여성(마리 르펜)의 이러한 취약성을 이용하고 싶어 한다.
이번 주 우크라이나와의 양국 안보 협정에 관한 프랑스 의회 토론에서 마린 르펜은 기권을 명령했다. 그녀는 러시아에 대한 태도 변화에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도록 하기 위해 우크라이나를 지지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마크롱 대통령은 자신의 소속 당의 주도를 통해 선거에서 이익을 얻으려는 분명한 의도를 보았다. 좌파에서는 분열이 뚜렷했다: 좌파 반란 세력과 공산주의자들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지 투표에서 반대표를 던졌고, 사회주의자들과 생태주의자들은 찬성표를 던졌으나 이들은 우크라이나에 군을 파견하는 제안안은 거부했다.
숄츠 총리는 또한 동부 주(Eastern Länder)에서 극우 정당 AfD(독일을 위한 대안)의 지배력이 강화될 수 있는 이번 가을 선거에서 극우 세력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 AfD 는 동독에 대해 그렇게 부정적인 기억을 갖고 있지 않은 시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또한 세력이 부상하면서 사민당의 지지 기반도 잠식했다. 숄츠 총리는 반(反)러시아 담론에 참여하지 않는 유권자에게 너무 적대적으로 보이기를 원하지 않는다.
제도적 요인
이번 프랑스-독일 충돌에서도 이전 충돌과 마찬가지로 각 정치 체제의 구조도 악영향을 끼쳤다. 프랑스의 정치 체제는 대통령제이고, 독일은 의회 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대통령이 외교 정책에 대해 독점적이고 개인적인 권한을 갖고 있다. 프랑스 대통령은 자신의 국제적 제안을 공식화하는 데 자신이 속한 정당의 다수(이 경우 그를 지지하는 소수당)의 동의도 필요하지 않다. 이와 대조적으로 독일에서는 총리가 연립 정부 파트너와 외교 정책을 협상해야 하고, 드물게 단일 정당으로 이뤄진 다수파 정부가 있는 경우에도 연방 의회는 외교 정책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개인적 요인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스타일도 무시할 수 없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인물들이 프랑스 엘리제 궁전과 독일 총리실에서 일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프랑스 대통령은 존재하는 것과 나타나는 것 둘 다 고귀한 인물에 의존하고 실제적이면서도 영향력 있는 리더십을 요구하는 정치 체제의 영향을 받는다. 반면 독일 총리는 아무리 눈에 띄더라도 일종의 동급자 중 첫 번째인 인물에 불과하다. 따라서 1945년 이후 독일 지도자들의 개인적 위상은 항상 하이퍼 리더십을 방지하는 확고한 구조로 구성되어 왔다. 그것은 추장(총통)의 질책이다.
이러한 프랑스 대통령과 독일 총리의 한계(역사적, 정치적)는 때때로 순전히 개인적인 스타일에 의해 강화된다. 현재 이글 두 지도자 간 격차는 아마도 지난 80년 동안 가장 넓을 것이다. 왜냐하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말하기를 좋아하는 프랑스 대통령과 가장 신중한 총리의 결합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과 아데나워 독일 총리는 개인적인 관계를 거의 형성하지 않았고 둘 다 그럴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퐁피두 프랑스 대통령과 브란트 독일 총리는 특별히 사이가 좋지는 않았지만, 독일인은 기욤 스캔들로 퐁피두의 경력이 끝날 때까지 점점 커지는 그의 인기가 파리에서 문제가 발생하지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지스카르 데스탱 프랑스 대통령과 슈미트 독일 총리는 중동 전쟁에 따른 석유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기술적 협력에 공감했다. 미테랑 대통령과 콜 총리는 양국 관계의 분위기를 높였지만 개인적 역동성을 항상 조정하지는 않았다. 콜 총리는 전후 독일 총리 중 가장 오래 재직했고 가장 중재적이었지만, 프랑스 대통령은 그 직위가 엄숙하게 행사되는 것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메르켈 독일 총리는 사르코지 (나중에는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을 얕잡아 보았지만, 그녀의 개인적인 자질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냉전 이후 유럽에서 독일의 확실한 경적 리더십을 위해 그렇게 한 것이었다. 마크롱 대통령은 이러한 프랑스의 ‘열등함’을 어렵게 끝내기를 원했다. 그가 퇴임하는 메르켈을 상대로 성공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는 눈에 띄지 않는 숄츠와 함께라면 더 쉽게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